어제 아침 식사 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질문이 있다며 나에게 물었다.
"자동차가 갈 수 있는 길은 2군데뿐인데, 한 군데에는 다섯 사람이 있고 다른 한 군데에는 한 사람이 있어. 엄마는 어느 쪽으로 갈 거야?"
니가 그 이야기를 알아?라고 속으로는 놀랐지만 태연한 척하며 답했다. "꼭 선택 해야 해? 그냥 피해 갈 수는 없어?" 뻔히 알면서 뭘 묻냐며, 어서 골라보라는 남편의 핀잔과 재촉이 이어졌다. 어려웠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마이크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도입부에 등장하며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트롤리 딜레마이다. 5명의 목숨과 1명의 목숨,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에겐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는 과정이 바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판단하는 과정이다.
판단을 위해선 기준이 필요한데 책에선 그 기준을 행복, 자유, 미덕 3가지로 크게 나눈 후 재러미 밴담, 이마누엘 칸트, 존 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저명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각 이론의 장점과 허점에 대해 설파한다.
그리고 실제 사례와 다양한 사고 실험을 통해 우리가 어떤 도덕적 문제, 분배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를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가져다주는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지 혹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원칙에 의해 해결할 것인지 그렇다면 그때의 '자유'란 과연 무엇인지
또 자유에 앞서 평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행위의 목적에 주목하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정도(적합성)를 문제 해결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 등을 고민하게 한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책에서 소개된 구제금융을 둘러싼 분노, 소수집단 우대정책, 대리 출산 계약, 동성혼의 합법화, 조상의 죄에 대한 사죄와 손해배상 문제 등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위에서 설명한 다양한 기준들 중 하나를 제비 뽑기 하듯 고르면 그만인 일이 아니다.
현실의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할 뿐 아니라 어느 하나를 고른다 한들 사실은 그 기준에서 벗어난 다른 판단들이 개입됐을 가능성 또한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폭발물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테러범을 고문하는 일을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린다는 이유로 합리화한다면 이는 다수의 행복을 기준으로 한 합당한 결론처럼 보이며 이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테러범이 아닌 테러범의 어린 딸을 고문하는 일은 같은 결과를 낳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주저 없이 찬성할 사람은 많지 않다. '다수의 행복'이란 기준 외에 도덕적 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하지만 끝까지 읽어도 그에 대한 정답을 알려주진 않는다. 다만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임은 밝히고 있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당연히 있을 여러 이견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과정에서 생기게 마련인 논란을 피하지 않고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태도가, 강한 연대의식으로 공동체 사회에 헌신하는 자세를 지닌 시민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말이다.
나는 끝내 1명과 5명 중 어느 하나를 골라 답하지 못하며 아들에게 되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할래?" 그러자 주저없이 5명이 있는 곳으로 자동차를 몰겠다고 말한다. 이유를 묻자 지난밤 이미 주사위를 던져 어느 쪽을 택할지 결정했다는 것이다.
'영화 <다크나이트>의 '하비 덴트'가 동전을 던지듯 그랬단 거구나...'
결정이 어려운 상황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운명을 고작 동전 던지기 우연에 기대어 결정하는 것은 아무리 공평함을 명분으로 삼아봤자 비겁하고 무책임한 태도이다. 즉, 정의로운 사회의 미덕을 갖춘 시민으로서의 바른 자세는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난, 이 문제에 대해 아이와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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