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북한 작가 반디의 단편소설집 <고발>

신생대유인원 2024. 2. 26.

 

단편소설집 <고발>의 작가 반디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탈북하는 친척을 통해 자신의 원고를 몰래 반출시켰을 뿐, 그는 여전히 북한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 생으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인 그는 자신의 조국인 북한이 구축한 사회주의 체제의 여러 문제들과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고발하기 위해 작품을 썼다. 


<고발>은 총 7편의 단편소설로 엮인 소설집으로 1989년부터 1993년까지의 5년 간을 창작 기간으로 하고 있다. 



탈출기
전쟁 후 사회주의 협동경리가 뿌리내리기 시작하던 때 자신의 땅을 고분고분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가 된 시아버지 때문에 결혼 후 남편 몰래 피임을 하는 아내, 아내의 결심은 한번 찍힌 낙인으로 인해 자손대대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감지함으로써 굳어진 것이었다. 

삶의 매 순간 발목을 잡는 그 사회적 낙인에 대해 아내는,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 모두에게 옛날 노예들에게도 찍었다던 그런 무서운 철인이 깊숙이 찍혀 있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 땅엔 인생불모지라는 낙인이 찍혀져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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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도시
아파트 6층의 남쪽과 서쪽창에서 내다보이는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 한경희의 어린 아들은 이를 보고 매번 겁에 질려 울어댄다. 아무리 달래도 나아지지 않는 경기에 가까운 울음 때문에 한경희는 어쩔 수 없이 덧커튼으로 두 초상화를 가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한경희의 가족은 결국 강제 이주를 당한다. 

"유전되는 것이 어찌 체질뿐이겠는가, 정신도 유전되는 법이라는 걸 모르는가?" -<고발> 中 유령의 도시


지척만리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도 여행 허가를 받지 못해 애가 타던 명철은 결국 몰래 기차에 오른다. 여러 번의 여행증 검사를 가까스로 통과하지만, 어머니가 계신 고향을 지척에 둔 마지막 초소막에서 '여행질서'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혀 3주간 노동단련소에 끌려갔다 처참한 몰골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오열하는 명철을 아내는 위로한다.

"명철은 목놓아 울며 땅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나 때로는 울음도 반항으로 되는 법이다. 반항 앞엔 오직 가차 없는 죽음밖에 없는 이 땅, 그래서 아파도 웃고 쓰거워도 삼켜야만 하는 것이 이 땅의 체질이었다." -<고발> 中 지척만리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소소한 이야기 7편, 그러나 이야기에 실린 무게는 결코 소소하지 않다. 반디는 어떤 마음으로 이 소설들을 썼을까. 

경제적 궁핍, 선전과 강압, 연좌제, 개인은 없고 오로지 체제와 전체만이 있는 북한사회에 드리운 어둠을 자신의 글로 조금이나마 밝혀보고자 하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무대'라는 제목의 이야기에는 남편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있는 형편인데도 김일성의 죽음 앞에서 정말로 진실돼 보이는 눈물을 쏟는 아내가 나온다. 그녀를 보며 화자는

" 어쩌면 그렇게도 상반되는 행동을 진실하게 해 보일 수 있는가."라고 한탄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서리나는 광경이라고 서술한다. 


불합리와 부조리, 모순이 판을 치는 사회임을 모르지 않건만 숨죽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아니 오히려 그와는 상반되는 행동으로서 자신들의 충성심과 진실됨을 증명해야만 겨우 삶을 부지할 수 있는 낱낱의 개인들.

그렇게 흩어져만 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대변함으로써 불모지 같은 사회에 깃들 작은 희망이나마 포기하지 않으려 한 작가의 용기와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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