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일본 소설 추천,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

신생대유인원 2024. 2. 19.

1988년 출간된 요시모토 바나나의 데뷔작 <키친>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장소이기만 하면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라고 부연함으로써 소설 속 '내'가 사실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으며 그 상황을 견뎌내는 일과 부엌이란 장소가 밀접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일본 소설 추천&#44; 요시모토 바나나 &lt;키친&gt;


키 친 
주인공 사쿠라이 미카게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중학교 입학 무렵엔 할아버지를 잃고 며칠 전 할머니마저 잃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매일을 부엌에서, 냉장고 소음 곁에서야 겨우 잠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다나베 유이치는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한다. 생전 할머니와 연이 있던 그는, 과거엔 아빠였지만 현재는 엄마인 에리코 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날부터 미카게와 유이치, 그리고 에리코 씨의 묘하지만 따뜻한 동거가 시작된다. 


나(미카게)는 첫눈에 다나베네의 부엌을 사랑하게 된다. 마룻바닥에 깔끔한 매트가 깔려 있던 그곳은 최소한의 조리 용품들만을 반듯하게 갖춘 품위 있는 주방이었다.

유이치의 제안으로 지인들에게 이사했다는 엽서를 쓰고 이사선물로 에리코 씨로부터 바나나 그림의 유리컵을 받은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낀다.

한가한 주말, 쏟아지는 아침 햇살 속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계란죽과 오이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 아파트 놀이터에서는 재잘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고 구름은 천천히 흐른다. 그렇게 그곳에서 나는 느긋하고 평온한 날들을 보내게 된다.

싱크대를 닦으며 함께 흥얼거리던 노래, 잠이 깨 가슴이 서늘하던 밤 함께 끓여 먹던 라면 등. 언제든 살아서 빛날 좋은 추억들이 나의 가슴에, 모두의 가슴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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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제까지고 그곳에 머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새 집을 알아봐 이사를 하게 되고, 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코 씨는 그녀가 일하는 게이 바에서 어떤 남자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나는 가슴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어째 우리 주변은 죽음으로 가득하네." 유이치와 나는 서글프게 웃는다.

다시 그의 집에 돌아온 날, 나는 공을 들여 최대한 거하게 저녁을 만든다. 샐러드, 파이, 스튜, 크로켓, 튀김 두부, 닭살 무침, 탕수육 등 국적이 뒤죽박죽인 요리들을 만들어 전부 먹어치운다. 나에게 그 음식들은 어둠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유이치에게 전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으며 또한 삼켜야만 하는 슬픔이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에워싸인 그 어둠 속에서도, 이유도 모른 채 도망치고만 싶은 그 절망 속에서도, 함께였고 즐거웠던 그 기억만은 둘의 마음속에 또렷이 남아 반짝였다.

소설의 끝, 에리코 씨는 없지만 두 사람 사이 그 시절의 명랑한 분위기가 되살아난다. 수많은 낮과 밤 함께 했던 식사 때처럼 말이다. 반짝이던 그 기억들이 그렇게 차츰 그들을 밝은 곳으로 떠밀어 갔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문장은 간결하고 선명하다. 읽고 있노라면 능숙한 화가의 속도감 있는 스케치를 따라가는 듯하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인간이 인간에게 건넬 수 있는 온기의 가치와 소중함을 담고 있는데, 그 온기는 혈육이기 때문이라거나 혹은 어떤 것의 대가라거나 하는 식의 조건을 달지 않는다.

그저 인간이기에 자연스레 피어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그리고 끈끈한 연대의식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모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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